영웅을 놓아주기 (Abschied von den Helden) - 다름슈타트
- Jina Oh
- 2019년 10월 21일
- 2분 분량
오페라 ‘투란도트’는 영웅이 되고 싶은 칼라프가 ‘투란도트’라는 미지의 세계를 정복하는 영웅기다. 절대 권력을 가진 중국 왕실에는 얼음같이 차갑고 아름다운 공주 투란도트가 있다. 그녀를 얻으면 중국이라는 대제국까지 얻을 수 있기에, 전 세계에서 온 구혼자들이 끊이지 않는다. 세 개의 수수께끼를 풀면 그녀를 아내로 맞을 수 있지만, 정답을 맞히지 못하면 그 대가는 참혹하다. 그동안 이 무모한 과제에 수많은 당대의 영웅들이 도전했다가 머리와 몸이 분리되고 말았다. 형장에 피가 멈추질 않고, 투란도트의 악명은 높아만 간다. 망국의 왕자 칼라프는 투란도트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홀려서 구혼에 도전한다. 그것은 어쩌면 멸망한 자신의 왕국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나라를 잃고, 두 눈까지 잃은 아버지 티무르는 아들마저 잃을까 봐 전전긍긍한다. 그리고 두 부자 옆에는 헌신적으로 티무르를 보살피는 노예 류가 있다. 그녀는 노예 시절 자신에게 미소 지어준 칼라프를 향해 헌신과 희생의 언어로 사랑을 표현하고 있지만, 칼라프는 알아듣지 못한다.
독일 다름슈타트 국립극장의 2019/2020년 시즌 개막작 ‘투란도트’는 ‘영웅 놓아주기(Abschied von den Helden)’라는 부제를 내세웠다. 발렌틴 슈바르츠의 연출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웅기를 비틀어, 칼라프의 내면의 고뇌에 집중하는 새로운 ‘투란도트’를 보여준다. 칼라프는 환상 속의 투란도트 이야기에 도취되어 흡사 환각에 빠진 듯 투란도트를 갈구하고 있는 화가로 설정됐다. 1막, 무대 위 반투명한 커튼은 칼라프의 현실 세계와 그의 환상 속 중국 세계를 구분하는 효과적인 장치였다. 사건은 그 뒤편에서 진행되는데, 조명과 합창, 그리고 푸치니의 음악이 어우러지며 몽환적이면서도 설득력 있는 무대를 그려냈다.
2막으로 넘어가면서 고대 중국 황실이 진시황의 병마용과 같은 모습으로 드러난다. ‘투란도트’에서 화려하고 거대한 중국 황실 배경의 무대는 관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할 절호의 기회이자 한정된 예산과 싸우는 극장 측의 고민이 많은 지점이다. 절대 권력의 상징성이 강한 진시황릉에서 착안한 안드레아 코치(무대감독)의 무대는 장대하면서도, 칼라프의 환상이 결국 병마용처럼 현실과 비슷하지만 결코 현실이 될 수 없음을 표현했다.

빛을 두려워하듯 신경쇠약처럼 등장하는 투란도트는 칼라프가 수수께끼를 맞춰갈수록 마녀와 같이 흑화하여 강렬한 카리스마를 뿜어냈다. 그리고 류의 희생이 뒤따랐다. 자신의 사랑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칼라프를 위해 류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사랑을 완성한다. 자결한 류 위로 구슬픈 합창이 들리며 무대 위에 비가 내린다. 그제야 칼라프는 류가 그토록 하고자 했던 말이 무엇인지 깨닫고 현실을 자각한다. 영웅이 되자고 했던 그는 모든 걸 내려놓고 비를 맞으며 무대 한편으로 쓸쓸히 퇴장한다. 이렇게 오페라의 막이 내린다.
사실 푸치니가 작곡한 부분은 바로 여기, 류의 죽음까지다. 푸치니는 이 오페라를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투란도트’ 초연 때 푸치니와 막역한 사이였던 지휘자 토스카니니가 이 부분까지만 지휘하고 떠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뒷부분은 후배 음악가들이 푸치니가 남긴 스케치를 바탕으로 작곡한 것이다. 그래서 음악적으로나 이야기 전개 면에서 매끄럽지 않다는 평이 많다. 이번 다름슈타트에서는 푸치니가 작곡한 부분까지만 사용하여 연출의 의도를 뚜렷하게 보여줬다. 비록 해피엔딩의 팡파르 없이 칼라프는 무대를 퇴장했지만, 관객에게 남겨진 여운은 더 깊고 길었다.
쥬세페 핀치가 이끄는 오케스트라는 정밀하면서도 드라마틱하게 푸치니의 음악을 잘 표현했고, 칼라프 역의 알도 디 토로는 캐릭터 설정상 영웅이 되기를 포기했음에도 훌륭한 연기력과 절창 덕에 역설적으로 이 공연의 영웅이 되었다. 이번 프로덕션에는 많은 한국인 성악가들이 출연하여 관람의 즐거움을 더했는데, 투란도트 역의 문수진은 무대를 장악하는 카리스마로 관객을 압도했으며, 다름슈타트 극장 소속 가수인 문석훈(티무르 역)과 이호철(팡 역의) 또한 역할을 탁월하게 소화하며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했다. 이 프로덕션은 내년 2월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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